당신의 '집'은 어떤 맛인가요?
이상한 질문같지만, 우리 기억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집'이라는 공간은
늘 어떤 맛이나 향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에게는 어릴 적
산채나물 비빔밥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과 함께 자던
약초냄새가 진한
가게 뒷 골방이 그렇습니다.
앨런 세이(Allen Say)의 그림책 《우유를 탄 홍차 (Tea with Milk)》를 통해
단순히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분석하는 영어공부나 차가운 '번역'을 넘어,
언어가 품고 있는 따뜻한 온도를 느끼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TEA with MILK by Allen Say
두 개의 찻잔
원작이 아닌 Gemini 로 생성한 이미지
책의 첫 장면은 작은 대비로 시작합니다.
"At home she had rice and miso soup and plain green tea for breakfast. At her friends' houses she ate pancakes and muffins and drank tea with milk and sugar."
"집에서는 아침으로 밥과 된장국, 그리고 아무것도 넣지 않은 녹차를 마셨다. 친구들 집에서는 팬케이크와 머핀을 먹고 우유와 설탕을 넣은 차를 마셨다."
Tea with Milk
단 두 문장이지만, 마사코의 분열된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plain green tea'에서 'plain'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보세요.
이 단어는 '단순한, 꾸밈없는'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반면 'tea with milk and sugar'는 전치사 'with'를 사용해
무언가가 '더해진' 차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 마사코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입니다.
"Her parents called her Ma-chan, which was short for Masako, and spoke to her in Japanese. Everyone else called her May and talked with her in English."
"부모님은 그녀를 마사코의 애칭인 마짱이라고 부르며 일본어로 말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메이라고 부르며 영어로 대화했다."
영어권에서는 이름을 줄여 부르는 것이 친밀감의 표현이지만,
일본식 애칭 'Ma-chan'과 영어식 이름 'May'는 전혀 다른 문화적 뉘앙스를 갖습니다.
마사코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는 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And I like my tea with milk and sugar!"
"You are going to be a proper Japanese lady," her mother said.
"전 홍차에 우유랑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게 좋아요!"
"너는 올바른 일본 숙녀가 되어야 한단다," 어머니가 말했다.
'proper'는 '적절한, 올바른'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전통적 기준에 맞는'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proper Japanese lady'는 단순히 '일본 여성'이 아니라
'사회가 기대하는 전형적인 일본 여성상'을 의미합니다.
가이진(外人)
"She could not make friends with any of the other students;
they called her gaijin and laughed at her.
Gaijin means 'foreigner.'"
"그녀는 다른 학생들과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가이진이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가이진은 '외국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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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교에서 마사코가 겪는 소외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make friends with'와 'become friends'은 둘 다 친구를 사귀다는 뜻이지만,
후자보다 전자에서, 우리는 더 능동적으로 친구를 사귀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는 친구를 사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She could not teach an American, she said."
"그녀는 미국인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했다."
선생님의 거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장에서 'she said'가 문장 끝에 오는 구조를 주목해보세요.
영어에서는 직접 인용 후에 'said 주어' 순서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서는 'she said'로 썼습니다.
선생님의 말에 대한 서술자의 거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I'm a foreigner in my parents' country, she thought. And they came back here because they didn't want to be foreigners. But I wasn't born here. I should leave home and live on my own, like an American daughter."
"나는 부모님 나라에서 외국인이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부모님은 외국인이 되기 싫어서 여기로 돌아왔는데.
하지만 난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어.
난 미국 딸들처럼 집을 떠나서 독립해야 해."
'live on my own'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적으로 살다'의 의미로,
'live alone'(혼자 살다)와는 그 느낌이 많이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like an American daughter'라는 표현에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미국적 가치관에 맞추기로 결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집
작가는 오사카 백화점에서 그녀가 느끼는 혼란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She walked aimlessly, whispering to herself,
'What if I ... Maybe I should...'
Her heart beat faster and faster.
She felt dizzy and confused."
"그녀는 목적 없이 걸으며 혼잣말을 했다.
'만약 내가... 아마 나는...'
그녀의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aimlessly'는 '목적 없이'라는 부사입니다.
'What if I...'는 '만약 내가 ~한다면'이라는 가정법 표현이지만,
문장을 끝맺지 못하고 있죠.
'Maybe I should...'도 마찬가지로
'아마 나는 ~해야 할 텐데'라는 뜻으로
말줄임표(...)를 사용하여 영어에서 망설임,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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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조셉과의 만남.
그가 건네는 차 한 잔은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It would give me great pleasure if you would have tea with me."
"당신과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다면 저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매우 격식을 갖춘 영국식 표현 하나로
우리는 신사같은 한 인물을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사코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I would enjoy that very much," she said in her very best English,
and bowed as a proper Japanese lady should."
"정말 기쁘겠어요," 그녀는 최고로 정중한 영어로 말하며,
올바른 일본 숙녀답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as a proper Japanese lady should'에서
어머니의 당부가 떠오르지요?
"May, home isn't a place or a building that's ready-made
and waiting for you, in America or anywhere else."
"You are right," she said. "I'll have to make it for myself."
"What about us?" Joseph said. "We can do it together."
"메이, 집이란 건 미국이든 어디든, 이미 다 지어져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장소나 건물이 아니에요."
"당신 말이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거겠죠."
"우리는 어때요?" 조셉이 말했다. "함께 만들어갈 수 있어요."
집이 'ready-made'된 완성품이 아니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늙어가며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 책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언어의 온도
"All this happened a long time ago,
but even today I always drink my tea with milk and sugar."
"이 모든 일이 오래전에 일어났지만,
오늘날에도 나는 언제나 우유와 설탕을 넣은 차를 마신다."
'All this happened a long time ago'로 시작하면서
독자는 이것이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but even today'로 급격히 현재로 돌아오죠.
'even'이라는 작은 부사가 가진 힘입니다.
책 전체를 3인칭으로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I'가 등장합니다.
앨런 세이는 자신이 바로 마사코와 조셉의 아들임을 밝히면서,
픽션처럼 보였던 이야기가 실은 자신의 가족사였음을 드러냅니다(revelation).
침묵이 말하는 것
"They walked in silence"
'in silence'와 'silently'의 차이를 아시나요? 'silently'는 단순히 '조용히' 걷는 것이지만, 'in silence'는 침묵이라는 무거운 공기 속을 걷는 것입니다.
침묵 자체가 하나의 공간이 되어 두 사람을 감싸는 것이죠.
영어는 때로 말하지 않는 것으로 더 많은 것을 표현합니다.
"What if I... Maybe I should..."처럼 끝맺지 못한 문장들,
"No!"라는 단 한 마디 외침,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침묵.
이런 여백들이 전하는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찻잔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One country is as good as another?"라고 메이가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어느 나라가 더 낫고 못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무엇을 만들어가느냐는 것이죠.
영어 학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원어민 영어'라는 환상을 좇지만,
실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 영어, 영국 영어, 호주 영어...
심지어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계층마다, 개인마다 다른 영어를 씁니다.
중요한 것은 'Let's make a home' - 우리만의 영어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찻잔에는 무엇을 담으시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당신이 선택한 맛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All this happened a long time ago, but even today I always drink my tea my way."
당신만의 방식으로, 당신만의 온도로, 당신만의 언어로...
당신만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시간입니다.